| 장돌뱅이의 애환
장돌뱅이의 애환
오늘 홍서방은 먼 길을 떠난다. 하루 이틀만에 오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작정을 한 길을 드디어 출발하는 것이다. 준비를 오래한만큼 돈도 많이 들고, 봇짐도 꽤나 무겁다. 요즘은 도대체 장판의 활기가 점점 떨어져서 대구장이든, 안동장이든, 한양장이든 이전의 분위기가 아니다. 그래서 홍서방의 봇짐은 장판이 열리기 전이나, 끝나고 난 다음이나 별 차이가 없는 경우가 많다.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홍서방은 멀기는 하지만, 좀더 큰 판을 가보기로 맘을 굳게 먹은 터이다.
집을 떠나 길에서 지내야 하는 밤들이 많은 장돌뱅이 홍서방이긴하지만, 이제는 점점 불편함이 깊어만간다. 나이 탓인가. 전에는 주막의 구들방이 주는 푸근함도 전같지 않아, 새벽에는 오히려 몸에 둘러붙는 감촉이 마치 비맞고도 며칠동안 갈아입지 않은 옷이 몸에 닿는 기분이다. 게다가 하루종일 볼 것 못 볼 것으로 더럽혀진 눈과 귀를 깨끗이 닦아주는 천상의 아름다움을 지닌 딸들, 존재자체로 생의 즐거움으로 몸서리치게 하는 막둥이 성보를 보지 못하는 괴로움이, 장돌뱅이 홍서방으로 하여금 이번 여행을 망설이게 하였으나,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큰 장판으로 간다는 설레임과 기대 때문에 밤새 잠을 설친 홍서방은 새벽같이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역전으로 갔다. 역전에는 홍서방같은 장돌뱅이도 많지만, 직업삼아 유람떠나는 한량도 꽤나 많다. 특히 자치기 채를 낑낑대면서 바다건너 가는 선비들을 보면, ‘저 사람들도 참 어려운 일을 하고있구나‘ 맘이 절로 안스러워진다.
“어! 너“
“누구시더라”
홍서방은 갑자기 자기 옆에 선 허연 머리의 노인네의 아는 척에 어안이 벙벙하다. 이런 노인네가 왜 나한테 말을 ‘하자’거리면서 시비를 거나. 잠시 정신을 못차리던 홍서방이 찬찬히 노인네를 쳐다보았다.
“아니 너!!!!”
홍서방이 노인네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소시적 성밖에서 동문수학하던 친구가 아닌가. 홍서방은 잠시 볼 일을 보고 노인네 친구와 숭늉을 마시기 위하여 멀찌기서 서있었다. 노인네 친구는 같이 온 듯한 여인네와 남의 눈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넓은 곳에서 입맞춤을 하지 않는가. 참 늙어도 곱게 늙었구만...
십년만인가, 다시 만나는 것이.
그래도 홍서방같이 장판을 떠도는 장돌뱅이가 아니라, 제법 터잡아놓고 하는 장사를 하는 지라 돈푼깨나 있어보여 한편으로는 초라한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런 친구가 있다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상인으로서 굴곡을 옆에서 한동안 지켜보기도 했던 홍서방은 노인네 친구와 다시 연락하기로 하고, 길을 떠났다.
장돌뱅이의 즐거움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생각지도 않았던 뜻하지 않은 만남이다.
꼬박 하루만에 도착한 홍서방은 읍내의 주막에다 봇짐을 풀고, 모래부터 열릴 장터에 가보았다. 이제까지 다니던 장판은 읍내 공터에 5일장이면 5일, 2일장이면 2일에 홍서방같은 장돌뱅이들이 장터에 모여서 각자의 물건을 풀어놓고있으면, 근동 사람들도 ‘으레 열리겠지‘ 하면서 서는 것과는 전혀 다른다.
여기 장판은 상당히 큰 물주가 우선 널찍한 장소을 큰 돈들여 사놓고서는, 홍서방같은 장돌뱅이들에게 ’여기 이런 곳에서 이러 저러한 물건을 보여주는 장판을 세웁네‘하고 광고를 한 다음, 물건을 살 사람들에게는 이러 저러한 물건이 물건너 오기도 하고, 판이 커서 볼 것도 많으니 ’와보쇼‘하고 광고를 한다.
개중에는 제법 크고 화려하게 꾸며놓아 ‘내 판에 들어오면 이만큼 돈을 벌수있소이다‘하고 과시하는 그판에서는 그래도 한다하는 장돌뱅이도 많이 보였다. 등잔도 수백개 켜놓고, 쳐다보기만 해도 숨이 턱으로 넘어갈만큼 어여쁜 아녀자를 데려다 놓고는, 천사들이나 입을 옷을 걸치게 한 곳도 꽤나 많다. 이에 비하면 홍서방의 판은 쬐그맣기도 하거니와, 저 구석으로 밀려나 일부러 쳐다보지 않으면 있는 지도 모를 장소에 그저 좌판에 물건을 널어놓았으니, 다른 판과는 비교하기도 민망하다.
초라한 홍서방!
홍서방의 마음이야 어떻던 간에, 장판은 그런대로 준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드디어 이틀 뒤, 장판은 열리고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천성인지, 아니면 오랫동안의 생활로 몸에 배어서인지 모르지만 홍서방은 장판에서 일어나는 일을 즐긴다. 우선 옆에서 판을 벌려놓은 장돌뱅이와 농을 건다. 이판에는 벌써 여러해를 참가했다는 그의 말에 따르면 점점 여기도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전에는 산지 사방에서 장돌뱅이들이 몰려와 물주가 빌려놓은 장소가 꽉차고도 모자랐지만, 이번에는 2/3정도밖에 차지 않았다. 살 사람도 예전만큰 오지않는다고 한다.
오후가 되어 홍서방은 문을 닫고 주막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첫날이니까‘하면서 미진한 오늘을 자족하며, 첫 날부터 무거워진 발걸음을 옮겼다. 둘 째날은 그런대로 전날보다 나았지만, 영 개운한 기분은 아니었다. 마침 아는 분이 찾아왔기에 술을 오랜만에 거하게 마신 홍서방은 주막에 들어오자 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새벽녘에 홍서방은 꿈에 막둥이의 응아를 손으로 만지는 꿈을 꾸었다. 똥을 만지는 꿈이 길몽이라고 알고있는 홍서방은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장터에 들어섰고, 막둥이의 똥꿈은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날따라 장사는 잘되었다. 역시 막둥이는 복덩어리야! 장판이 끝나고 홍서방은 다시 한번 막둥이의 복꿈을 상기하고는 투전판에 끼어들었다. 투전과 같은 도박에는 전혀 무식인 홍서방이지만, 종자돈의 수십백에 달하는 돈을 땄다. 막둥이가 그냥 복덩어리가 아니야~, 하늘이 내려주신 거야! 기분이 흐뭇하여 주위사람에게 마실 것을 대접하고는 방으로 돌아와 구들방에 누워 이리저리 뒹구면서, 생애 처음으로 도박판에 돈을 딴 자신의 운을 믿으려고 애쓰면서 잠이 들었다.
이제 내일모래면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 가면 성보의 응아 때문에 장사도 잘되고, 투전판에서 돈 딴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얘기해주어야지.
행복한 홍서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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