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키호테를 다시 읽었다. 예전처럼 단행본으로 된 얇은 책이 아닌 외국어대의 박철교수가 원전을 완역한 것이다. 라만차의 떠돌이 영웅적인 기사 돈키호테, 그가 목숨을 걸고 흠모하는 둘시네아공주, 기사도의 감초인 산초 판자, 그리고 당나귀 명마인 로시난테. 모두가 생각하면 할 수록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는 캐릭터들이다.
돈키호테 중에서 가장 압권인 장면은 역시 풍차를 거인이라고 생각하고 달려가는 돈키호테와 이를 말리는 산초 판자의 다툼이다. 결국 돈키호테는 풍차모습을 한 거인과의 한판 싸움에서 처절한 패배를 하고 만다. 난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마치 나를 보는 것 같다. 처음 내 나름대로의 사업을 한다고 주변의 모든 사람이 말렸지만, 난 세상을 단 시일내에 정복할 수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찼었다. 그리고 과감히 사표를 내었다. 비록 직원도, 독립된 사무실도 없이 집에 팩스와 컴퓨터를 놓고 시작했을 지언정 온 세상의 무역은 다 내 손안에 들어있는 줄 알았다. 1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풍차를 향하여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모습 그대로이다. 돈키호테는 그 전투가 끝나고 나서도 풍차가 모습을 바꾼 거인이었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듯이, 나 역시 아직 세상이 내 손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클 수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 첫 번째 전투에서 만신창이된 돈키호테는 창을 잃어버렸고, 난 세상을 손에 넣는 것이 호락호락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난 인터넷이라는 날이 아주 잘 선 칼을 얻었다.
첫 번째 전투가 끝난 이후 난 인터넷이라는 칼을 갈고 닦았다. 집안에서 한달여를 혼자 공부하면서 홈페이지를 만든 것이다. 인터넷 초창기에 만든 것이라 소스코드를 직접 타이프해가며 만든 어설픈 것이었지만, 모두들 신기해하였다. 이 것이 나에게 어떤 힘을 가져다 줄 지는 몰랐다. 얼마있지 않아서 나는 세 명의 종자를 만난다. 이름하여 그 유명한 무어, 길더, 멧칼프이다. 무어는 컴퓨터의 저장용량은 매 18개월마다 2배로 늘어나지만 가격은 같을 것이라는 법칙을 만들어, 나로 하여금 무한대의 기억력을 가지게 하였다. 멧칼프는 ‘네트워크의 가치는 그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구성원 수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을 만들어 내가 연결할 수 있는 사람들의 가치를 무한대로 만들어 주었다. 길더는 ‘광섬유의 대역폭은 12개월마다 3배로 증가한다’는 법칙을 만들어, 이 세상 사람들을 빛의 속도로 만날 수있도록 해주었다. 무어덕분에 현재 내가 저장할 수 있는 정보의 용량은 300GB(기가바이트)정도가 된다. 무모함에 있어서 한참 선배인 돈키호테가 읽었다는 다락방에 가득찬 유명한 편력기사들의 이야기를 모두 모아봐야 10MB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게다가 그의 책들은 모두 돈키호테만 볼 수 있지만, 나의 300GB는 나와 인터넷으로 연결된 사람들과 필요하다면 공유할 수도 있다. 지구상에서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이 수억명이니 그들이 가진 정보와 접속자의 수의 제곱을 곱해보자. 그러면 숫자에 붙어있는 ‘0’을 세기에도 종이가 모자랄 지경이다. 하지만 정보를 나누는 데 돈키호테처럼 로시난테를 타고다니면서 말을 해야한다면 역시 쓸모가 없는 허수에 불과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구리선의 수천분의 1밖에 되지 않는 광섬유를 이용하여, 수억개의 글자를 한번에 보낼 수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길더가 쓴 텔레코즘에 자세히 적혀있다. 돈키호테는 시속 30킬로의 로시난테를 타고 광야를 떠돌아다니며 둘시네아공주를 향한 일편단심을 노래하였지만, 난 컴퓨터를 타고 앞서 말한 세 명의 종자를 앞세워 온 세상을 빛의 속도로 돌아다니며 세계를 정복하기 위한 태세를 갖추었다. 돈키호테 형님은 둘시네아공주님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 지 알지도 못한 채 광야를 무작정 방황하였지만, 난 모든 정보를 이용하여 완벽하게 준비가 된 듯하였다.
그리고 싸움에 나가 이기기 위한 칼로는 발가락 양말을 선택하였다. 태고적에 만들어졌지만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진검을 하늘이 내려준 것이다. 그 것은 흙속의 진주라기 보다는 광장에 꼽혀있었지만, 아무도 뽑지 못한 아더왕의 보검 엑스칼리버와도 같은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지만, 무좀양말이라 불리며 무시받고 천대받던 발가락 양말의 진가는 현대판 돈키호테를 만나면서 드디어 눈부신 빛을 발하는 엑스칼리버로 화려하게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때 내게 필요한 것은 나에게 영감을 불어줄 둘시네아공주이었는 데, 그녀는 오로라, 눈, 호수의 나라인 핀란드에서 나타났다. 스페인의 둘시네아 공주는 돈키호테에게 그리 호감을 갖지 않았지만, 핀란드의 둘시네아 공주는 그보다 훨씬 아름답고 현명하였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녀는 항상 한국의 돈키호테에게 아름다운 시를 보내고, 때로는 현금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그 이후로 나는 온 세상을 바쁘게 움직였고, 세상은 나의 부름에 호응하는 듯하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적의 모습을 보니 그들도 역시 나와 같이 무어.길더 그리고 멧칼프를 종자로 거느리고 있고, 컴퓨터를 타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이런. 뿐만 아니라 나의 적들은 나의 홈페이지에 있는 양말의 모델을 그대로 모방하기까지 하였다. 그 들이 들고있는 칼은 짝퉁이기는 하였지만, 어쨌든 나의 진검과 비슷하게 보였고, 게다가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이제는 누가 진짜 엑스칼리버를 가지고 있는 지도 모를 지경이 되었다.
이제 나는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하여야 한다. 돈키호테는 철렁거리는 갑옷에, 낑낑대는 로시난테를 타고 산초판자의 도움을 받으면서 육박전으로 싸웠다. 하지만 나는 책상위에 앉아서 발가락양말에 상상력이라는 보호막을 입혀서 유럽.미국.카나다.일본등을 순간이동하면서 빛의 속도로 행동해야 하게 되었다. 돈키호테의 적들은 그의 상상력이 만든 적이었지만, 나의 적들은 실제하지만 물리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돈키호테의 상상력은 적을 만드는 도구이지만, 이제 상상력은 적과 싸우기 위한 절대적인 도구가 되었다. 뛰어난 상상력이 발가락 양말의 가치를 높여줄 것이다. 아직 적들은 그 것을 알아채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 들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 들과 내가 접하는 정보의 양이 점점 동등해지기 시작하였고, 내가 아는 것은 그 들도 알게 될 것이고, 내가 하는 것을 그 들도 하게 될 것이다. 역으로 보아도 마찬가지이지만, 항상 내가 빠르기 때문에 그들을 모방한 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돈키호테가 편력기사의 책을 읽으면서 모험에 대한 상상력을 키웠듯이, 나 역시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책을 읽으면서 상상력을 키우고 있다. 많이 알아야 상상할 거리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무한한 상상력은 끝없는 모험을 가능하게 한다. 비록 돈키호테가 산초 판자에게 약속한 점령지의 총독자리를 주지 못하였지만, 무수한 좌절과 실패 속에서도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 점이 돈키호테를 역사적 유명인으로 만든 것이다. 나 역시 현대판 돈키호테임을 자신한다.
세르반테스는 낭만적인 기사의 상상력을 키웠지만, 조지 길더는 현대판 기사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현실적 기술에 대하여 풍부한 사례와 전망을 적어놓았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하고자 하는 바를 상상해보는 재미, 바로 그런 재미가 진짜 책을 읽는 재미가 아닐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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