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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세상 – 수락산

우리 집은 상계동 산골짜기 입구에 위치해있다. 그래서 집에서 나와 2분이면 어느 새 숲이 울창한 수락산 입구에 들어와있다. 이 곳으로 이사온 지도 벌써 2년이 다가온다. 그 전에도 멀지않은 곳에서 살았지만, 막상 골짜기 초입으로 오니 산을 자주 가게된다. 한달에 대여섯번은 가게 된다. 하지만 너무 가까이 있으면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다. 요즘은 게을러져서 그렇지만, 처음 이사오고 나서는 일주일에 3-4번은 갔다. 처음 이사오고 1년정도는 정말 부지런히 산에 다녔다. 그런데 시간이 차츰 흐르면서 산에 가는 횟수도 점점 줄어 이제는 한달에 4-5번뿐만 올라간다.

내가 산에 가는 이유는 물론 건강을 위한 것도 있지만, 산을 걸으면서 생각을 할 수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산에 오르면 우선 머리 속이 선선해짐을 느낀다. 잠에서 덜 깬 나의 몸과 정신은 입구에 들어서면 벌써 개운해지기 시작한다. 집에서 나와 20분이면 능선이 나오는 데, 이 능선을 10분 따라가면 바위가 나온다. 나는 이 바위를 ‘나의 바위’라고 부른다. 이 바위에 올라서면 의정부에서부터 관악산까지 서울시내가 훤하게 보인다. 대부분의 경우는 뿌연 매연 때문에 시내가 깨끗하게 보이지 않는다. 도봉산과 북한산이 멀지 않지만, 역시 희끄므레하게 보인다. 그냥 멍하니 이 바위에 걸터앉아 10-20분을 앉아있다가, 내려오곤 한다. 이 바위에 앉아서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수없이 왔다갔다하는 자동차들과 끝없이 펼쳐져있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나같이 지낸다고 생각하면, 사는 게 별거아니라는 걸 매번 깨우친다. 길거리에서 부딪치는 사람이나 커보이는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나, 각 자의 삶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같지만, 사실 산에 올라서 오늘 할 일과 어제 한 일들을 돌아보면 여전히 비슷하고, 내가 대했던 사람들이 특별한 경중이 없이 모두가 공평하게 소중한 사람들인 것이다. 때로는 이런 저런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내가 돈을 많이 벌면, 저쯤의 땅은 사들여서 멋있는 집을 지어야지, 저쯤에는 산이 보이는 멋있는 카페를 지어 친구들과 잡담이나 하면서 여생을 지내야지. 아니면 이번에 하는 일이 잘되면 얼마를 벌 수있을까, 생각대로만 된다면 아이들과 외식이라도 거하게 해야지. 이런 뜬굼없는 공상을 하고있노라면, 어느 새 시간이 꽤 지나가있다. 그래도 공상은 즐거운 일이다. 공상에서는 나를 괴롭게 하는 일이 없으니까. 평일인 경우에는 다시 내려와 출근을 서두른다. 그러면 집사람은 아이들의 도시락을 싸면서, 막내와의 전쟁도 같이 치루고 있다. 아이들은 학교에 늦은 시간이어도 무어가 그리 재미있는 지 만화를 보고 키득대고, 집사람은 이런 아이들은 혼내면서 도시락을 싼다.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렇듯 난 일상과 공상을 수시로 오가면서 산다.

시간이 더 있는 공휴일이면 능선 길을 따라서 30분정도를 그저 산보하듯이 산을 더 즐긴다. 
공휴일의 수락산은 매우 붐빈다. 서울 근교에서 거의 유일하게 입장료가 없는 산이고 등산하기에 그리 험하지 않고, 입구도 여러 군데인데다, 지하철도 있어서 주말에는 가벼운 등산복 차림으로 오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 쉬는 날에는 보통 7-8시쯤 산에 갔다가 10시쯤 내려오면 벌써 등산로는 사람들의 웃는 소리로 메아리친다. 공휴일에는 막걸리를 파는 아줌마.아저씨가 있지만, 사먹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사람으로 가득찬 공휴일의 수락산은 그런대로 사람사는 제 각각의 멋을 등산복으로 표현해서 보기 좋다.

날씨가 좋을 때 올라가는 산은 오히려 깨끗한 맛이 적다. 가까운 거리는 선명하게 보이지만,능선에 올라가보면 오히려 세상은 뿌였다. 공기중에 떠있는 먼지들이 시야를 가리기 때문에 바로 지척에 있는 도봉산,북한산도 어렴풋이 보일 뿐이다. 마치 세상이 선명하지 않다는 것을 나에게 보여주는 것같다. 세상은 이렇듯 선명해 보이지만,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그 속에는 온갖 부조리와 불확실성이 있다. 그리고 그 속을 난 분명히 바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닐 지도 모른다. 보이는 것을 다 믿지는 말자. 이게 내가 맑은 날 수락산에 올라갔을 때 매번 다짐하는 맹세이다.

하지만, 비온 뒤 올라가는 산은 정말 맛이 깔끔하다. 온갖 먼지들이 떠다니던 뿌연 서울의 하늘이 비가 쓸어간 다음에는 눈이 시원할 정도로 멀리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아쉬운 것은 이런 선명한 세상을 보기가 그리 흔한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때로는 우비를 쓰고 비가 오는 산을 올라가기도 한다. 우비로 쏟아지는 빗방울 소리, 산에 퍼지는 비, 바람, 나뭇잎의 교향악. 바위에 앉아 비오는 도시를 쳐다보면서, 갑자기 도사가 된 듯한 기분. 능선을 걸을 때는 구름을 타고 가는 기분이고, 골짜기 개울물을 지날 때는 아마존의 깊은 정글을 지나는 기분이다. 바로 10분만 나가면 버스가 다니고, 지하철이 다니는 번잡스런 도시이지만, 그리도 가까운 곳에서 이런 정글을 맛볼 수있다는 신기함. 어쩌면 내가 유난히 비를 좋아하는 지도 모른다. 특히 쏟아지는 비는 세상의 많은 것을 가린다. 반대로 그 비속에 있으면 세상으로부터 나를 감춰주기 때문에 내가 더 비를 좋아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맨 얼굴을 두드리는 비의 상쾌함은 마치 손안대고 세수를 하는 기분이다. 아마도 난 전생이 개구리였나보다. 비만 오면 산에가고 싶으니까.

아침마다 또는 주말에 산속에 들어가는 재미가 있다면, 집안에서 산을 즐기는 재미또한 쏠쏠하다. 집의 거실에서 밖을 쳐다보면 수락산이 마치 병풍처럼 펼쳐져있다. 여름에는 짖푸른 숲을, 가을에는 단풍을, 겨울에는 눈덮인 산을, 봄에는 신록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자연의 모습을 집안 가득히 선사한다.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수락산은 변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경치는 겨울에 눈보라가 치는 모습이다. 집과 산의 거리는 갑자기 멀어지고 바람에 휘몰아 치면서 창문을 건드리는 눈의 모습은 제법 커보이기도 한다. 물론 비가 오는 모습도 좋아하지만, 비는 보는 것보다 몸으로 받아들이는 게 더 좋다. 이럴 때 난 화가이고 싶다. 그 것도 하얀 종이에 묵직한 붓을 일필휘지하면서, 수락산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릴 수 있는 그런 화가이고 싶다. 물론 누가 그렇게 해주지 않아도, 우리 집은 매일마다 동양화를 바꾸어 걸어놓는다. 거실에서 보는 눈.비오는 바깥 산 풍경도 산속에서 보는 풍경 못지않게 즐겁다. 앞뒤가 다른 모르는 사람이 살고 있고, 또 그 사람들의 생활을 엿본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 그리고 엿봄을 당하기 싫어서 커튼을 치고 사는 답답함 대신에, 언제나 활짝 열려진 거실 창을 통하여 자연의 신선함을 즐기는 우리 집이 좋다.

그런데 이런 즐거움을 즐기기에는 가슴아픈 사연이 있다.

지난 번에 살던 집에서 그런대로 잘 살고 있었지만, 막둥이가 태어나면 세간살이가 늘어 집이 좁을 것같았다. 게다가 여러가지 사정상 집을 옮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집사람과 나는 새로운 집을 물색하기 시작하였고, 아이들 공부를 위하여 인근에서는 그래도 교육환경이 나은 곳의 아파트를 여러 곳 돌아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현재 살고있는 아파트도 돌아보았다. 하지만 공부환경이 나은 곳을 둘러보니 너무 시끄럽고, 아파트들이 너무 바짝 붙어있어 도대체 사생활이라는 것이 없어보였다. 그렇지 않음 밤낮으로 커튼을 치고 살아야 했다. 결국 우리는 공부하기 편한 곳보다는 살기 편한 곳으로 정하였다. 당시만 해도 아이들이 초등학교 3,5학년말이어서 ‘학원에 다녀야 얼마나 다니겠나’하고, 쉽게 생각했다. 그런데 1년뒤에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학원을 보낼려니 우리의 선택이 부모로서 대단히 현명하지 못했다는 후회를 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학원다니기가 상당히 불편해졌다. 끝나는 시간이 8-9시인데 때로는 학원버스가 없어, 애엄마가 아이를 조수석에 태우고, 큰 아이를 데리러 가야하는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계집아이이다 보니 밤길을 혼자 오라고 하기가 겁이나서이다. 게다가 지난 번에 살려고 하다가 시끄럽고, 공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포기했던 그 사이에 1억이나 올랐지만, 우리 집은 거의 오르지않은 채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아쉬움이 있다. 어쩌면 아이가 더 공부를 열심히 한다면 학원이 가까운 곳으로 옮겨야 할 지도 모르지만, 가능하면 이 곳을 떠나지 않을 작정이다. 아파트 값이라는 것이 이런 조용한 동네, 학원이 없는 동네는 오르지 않고, 시끄럽고, 교통이 막히고, 학원이 많은 곳이라야 올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산자락에 자리잡은 집사람과 나의 우둔함은 1억이라는 어마어마한 기회비용을 치루어야 했다. 내가 거꾸로 살아가는 것인지, 세상이 거꾸로 살아가는 것인지는 몰라도 부동산을 통한 재테크는 빵점인 셈이다.

어차피 재산이야 하늘이 주는 것. 잃어버린 부분은 나중에 알아서 주시겠지. 앞으로 나의 시간적, 경제적 사정이 나아지면 수락산을 찍는 사진사가 되려고 한다. 전문적이라기 보다는 디지털카메라로 ‘나의 바위’에서 내가 보는 세상을 사시사철 같은 시각에 담아, 전시회를 하면서 노후를 지내고 싶다. 사시사철 변하는 도시와 북한산, 그리고 막둥이가 커가는 모습을 같이 찍어서, 그 속에서 내가 살아왔던 인생의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을 하고 싶다. 물론 그 동안 수락산이야 변하지 않겠지. 내 맘이 변하면 변했지.

하지만, 이렇게 많은 즐거움을 주는 산자락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열심히 산에 다녀야겠다.